독일의 통일과 방송의 역할

분단국 통일사례 2006/08/17 12:11
적대적인 분단국의 상황에서 방송이 가장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매체일 수 있는 것은 방송이 물리적인 분단의 장애를 뛰어넘을 수 있는 대량적 메시지의 전파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독일의 통일에 미친 방송의 영향에서도 실증해 볼 수 있다.

고르바초프의 불간섭과 개방정책, 동독 구정권의 경제적 파산, '98년 여름 헝가리·체코·폴란드의 자유화 물결과 국경개방에 의한 동독인의 대량 탈출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서독 방송의 누적적인 영향이 동독 국민들의 봉기를 유발시켜 독일을 통일로 이끈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의 분단상황에서 각 시기별로 방송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같은 분단국으로서 독일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분단극복을 위해서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1) 50∼60년대 : 냉전적 대립시기

ARD(독일 공영방송국 업무협의회)가 1950년에 설립된 이후 베를린에 NWDR(북서부 독일방송국)이 생겼으며, 1954년부터 SFB(자유베를린방송국) 및 RIAS(미국 주둔지역 방송국)가 방송을 개시하였다. SFB와 RIAS는 서독을 비롯한 서방측의 대외선전 창구로서 방송전파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이념방송과 사회주의의 서구성을 폭로하는 심리전 방송을 전개하였다. 특히 RIAS 라디오는 1953년 6월17일에 동독에서 있었던 민중봉기의 과정과 1961년의 장벽 구축에 관한 보도를 통해 동독에서 아주 높은 명성을 획득하였다.

50년대 중반이후 TV의 등장과 더불어 공중에서의 전쟁은 더욱더 첨예화된다. 베를린의 지리적 위치 덕분에 이곳에 세워진 송신시설 및 국경지역의 방송을 통해 거의 모든 동독 국민들이 서독의 라디오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고, 약 80%가 최소한 1개의 서독 TV방송을 시청할 수 가 있었다. 동독인들은 동독의 방송에 비해 서독의 방송을 보다 신뢰하였으며 그 결과 서독의 방송은 인기가 있었고, 사실상 자유세계에 관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1961년 8월31일 베를린의 장벽 구축은 동독의 정치적·경제 사회적인 열세로 양독간의 경제적 격차가 서독으로 가는 노동력의 대거 이주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최후의 피신처인 베를린이 막혀버리자 동독인의 서독매체에 대한 수용 욕구는 더욱 높아졌고, 동독이 서독 매체 수용을 더욱 적극적으로 통제하게 된다.

동독 당국은 방해전파를 발사하거나 서독 지향 안테나의 철거 및 방향 수정, 서독방송의 수용을 규제하는 법적 규정과 함께 각종 처벌, 위협수단을 동원하는 등 처음에는 적극적인 서독 TV시청 금지 조치를 마련하여 서독방송 수신을 저지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그 이후 서독의 생활상과 문화는 방송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

서독은 동독을 가시청권으로 확보하려는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1961년 서독 정부는 2개의 연방라디오 방송국인 DLF(Deutschlandfunck)와 DW(Deutsche Welle)를 설립하였다. DLF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 특히 동독 국민을 주 대상으로 - 독일에 대한 폭넓은 모습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개국하였으며, DW는 외국의 라디오 청취자들에게 독일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의 다양한 모습을 들려주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독일의 견해를 표명하고 설명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았다.

공영 TV 방송국인 ZDF(독일 제2 TV)는 "전체 독일의 TV 시청자들에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세계에 일어난 사건들에 관해 특히 독일의 현실에 대해 광범위한 실상이 전달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특히 평화롭고 자유롭게 독일의 통일에 기여해야만 한다"면서 1963년 방송을 개시하였다.

ZDF방송도 ARD의 TV방송(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독일 제1 TV와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북부Ⅲ, 헤센방송Ⅲ, 바이에른 방송Ⅲ 등 3개 채널)보다는 약간 송출력이 작으나 동독을 커버할 수 있었다. 1961년 이후부터는 ARD에 의해 (곧이어 ZDF와 공동으로) 동독을 위한 'TV 오전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는데, 60년대에는 '공중전파 전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했다.

(2) 70∼80년대 : 동질성 회복 시기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친 동서독간의 첨예한 방송 대립으로부터 70년대를 거치면서 동독공산당 서기장 호네커는 서독 TV에 대한 동독 TV의 경쟁력 확보를 주창하면서 동독인의 서독 TV시청을 허용하였다.

그 후 동독의 TV방송은 서독의 ARD, ZDF와 동독 시청자를 대상으로 경쟁하게 되었다. 서독방송이 제공하는 자유세계 및 국제뉴스에 대항하는 동독방송은 여전히 선전 목적의 역정보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동독 국민에 대한 효과는 거의 없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또한 서독의 동방정책의 결실로 1972년 12월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주의 공화국의 상호 관게에 대한 기본조약', 이에 앞서 11월 '동·서독 언론교류 관련 합의문서'가 체결되었다. 이로 인해 왕래가 불가능하였던 서독 특파원의 동독 거주가 가능해짐으로써 서독의 매스미디어가 통일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TV의 상호 시청이 가능하였으나 동독 텔레비전이 서독에서 큰 역을 하지 못한 반면, "저녁마다 독일의 전파적 재통일이 벌어진다"라고 표현될 정도로 동독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서독 방송을 시청하였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Spiegel'에 따르면 동독 주민의 85% 서독의 시사 뉴스 프로인 'Tagesschau'와 'Teute'를 시청하였다고 한다.

1980년대에는 당간부들이 공개적으로 서독방송의 내용을 언급하기도 하고, 동독 주민들이 서독 주민의 실상을 아는데 유용하다는 견해도 표명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동독은 공동안테나나 유선방송망 등을 통하여 동독 주민의 서독방송 시청욕구를 충족시키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방향전환은 동독 지배층의 자신감에서 기인하였다기 보다 현실적으로 주민들의 서독 방송욕구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동독은 서독 방송의 시청을 인정하는 대신 서독방송의 내용을 부정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거나 서독방송에서 지적한 동독내 문제와 유사한 서독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등 '반대정보'를 제고하는데 주력하였다. 서독방송이 제공하는 자유 세계 및 국제뉴스에 대항하는 동독방송은 여전히 선전목적의 역정보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동독 국민에 대한 효과는 거의 없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동독 주민이 서독 방송을 많이 시청하였다는 것보다는 서독방송의 보도내용을 신뢰하였다는점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동독인들은 서독 방송이 국내문제를 보도할 때의 중립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수용하여 자신들이 직접 평가할 수 없는 외국에 관한 보도나 동독의 보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동독 방송을 평가하게 되었다. 즉 동독방송에서 동독의 업적을 찬양한 내용은 축소하여 해석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은 실제로 더 심각할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 것이다.

동독 주민들의 서독 TV시청은 동서독 주민들이 이질감을 극복하고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동일한 방송을 시청함으로써 동서독 주민들이 서독이나 동독 현실에 대한 공통적인 시각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비판적이고 중립적인 서독 방송을 접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은 일정한 수준의 민주주의 교육을 받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동독주민들은 동독의 방송과 서독의 방송을 비교함으로써 공산주의 체제 유지에 필수적인 국가적 선전도구로서 동독 방송의 효율성이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체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89∼90년 : 정치적 통일시기

서독의 방송은 구 동독의 공산체제 붕괴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89년 여름과 가을에 불간섭 선언과 개혁정치에 따른 체코·헝가리·폴란드의 국경개방으로 휴가를 빙자한 동독인들이 헝가리 주재 서독 대사관에 집단적으로 탈주하는 장면을 서독 TV들이 집중적으로 보도하여 동독 국민의 탈출과 인민봉기를 촉진시켰다.

Helmut Hanke는 "TV를 통해 실재 존재한 사회주의가 독일 땅에서 사라졌다"라고 주장하면서 "TV가 없었다면 89년 10월 9일 동독의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며, 텔레비전을 통해 시민들은 단결할 수 있었다"고 TV의 역할을 강조한다. 당시 대부분의 시민들은 텔레비전의 보도를 통해 동독의 경찰력이 천안문사태처럼 데모대에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거리로 나와 데모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요약컨대 서베를린 방송의 지리적 유사함과 동서독 국경지역의 강력한 송출시설 등으로 동독인들은 대다수가 서독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독의 방송문화와 생활양식이 동독인의 일상생활과 사고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동서독 국민간에 한민족으로서의 공동체의식을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독일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경우는 매우 상이하다. 동독의지형은 80% 이상이 평지로 서베를린의 방송 전파를 쉽게 수신할 수 있었고, 동독 정부의 개방성이 방송의 역할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폐쇄적인 북한정권의 채널 선택권 제한으로 방송의 역할에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공작방송의 지속적인 실시·위성방송 등 뉴미디어를 활용한 방송송출 확대 등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우리 방송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북한 주민들에게 우리에 대한 적개심 해소와 자유화 사조를 전파하여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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